
후삼국시대 완전 정리: 통일신라의 붕괴부터 고려 통일까지
후삼국시대는 말 그대로 “다시 나타난 세 나라의 시대”입니다. 예전에 고구려·백제·신라가 삼국을 이루었듯이, 통일신라가 무너져 갈 때 다시 고구려 계승 세력·백제 계승 세력·신라가 서로 다투던 시기가 있었죠.
이 시기를 보통 후백제(견훤) – 후고구려·태봉·고려(궁예·왕건) – 신라(경순왕)의 삼각 구도로 설명합니다.
이 글에서는 단순히 “전쟁만”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,
- 기초가 되는 전조현상(통일신라 말기부터의 불안 징조)
- 후백제·태봉(후고구려)·고려의 등장 과정
- 후삼국 전쟁의 흐름
- 936년 고려 통일까지의 결말
을 시간 순서대로 차분히 정리해 보겠습니다. 초등학생도 읽을 수 있도록 쉽게, 하지만 깊이는 충분히 넣어서 설명하겠습니다.
목차
- 후삼국시대란 무엇인가?
- 통일신라 말기의 전조현상: 왜 나라가 흔들리기 시작했나
- 후백제와 태봉(후고구려)의 탄생: 견훤과 궁예의 등장
- 왕건의 고려 건국과 세 나라의 힘겨루기
- 후삼국 전쟁의 큰 흐름: 공산 전투부터 고창 전투까지
- 결말: 신라의 항복과 일리천 전투, 고려의 통일
- 후삼국시대의 의미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
- 정리 요약 및 자주 묻는 질문(FAQ)
후삼국시대란 무엇인가?
다시 등장한 세 나라의 시대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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시기: 대략 9세기 말~10세기 중반, 좁게는
- 후백제 건국(900년)부터
- 후백제 멸망·고려 통일(936년)까지 약 36년 정도를 많이 이야기합니다.
-
등장 세력
- 후백제: 전라도·충청도 일대를 중심으로 한 견훤의 나라 (옛 백제 계승 주장)
- 후고구려·태봉 → 고려: 처음엔 궁예가 고구려 계승을 내세워 세웠다가, 나중에 왕건이 쿠데타로 집권해 ‘고려’를 세움 (고구려 계승 주장)
- 신라: 한때 삼국을 통일한 통일신라가 남부에 명맥만 유지하다가 경순왕 때 고려에 항복
즉, “통일신라 하나”였던 한반도 남부가 다시 세 나라로 쪼개졌다가, 왕건이 다시 통일하는 과정이 바로 후삼국시대입니다.
통일신라 말기의 전조현상: 왜 나라가 흔들리기 시작했나
후삼국시대는 갑자기 어느 날 “툭” 하고 생긴 게 아닙니다. 통일신라 말기부터 나라가 서서히 무너지는 전조현상이 수십 년 동안 계속 나타났습니다.
1) 왕위 다툼과 중앙 귀족 정치의 붕괴
통일신라 중후기에 이르면,
- 왕이 바뀔 때마다 귀족 세력이 서로 편을 갈라 싸우고,
- 때로는 반란이나 쿠데타로 왕이 죽는 일도 벌어졌습니다.
왕권이 약해지고, 귀족들끼리 싸우다 보니
- 나라 전체를 다스릴 중앙의 힘이 점점 약해지고
- 지방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졌습니다.
어린 친구들 기준으로 비유하면,
반 전체를 다스리는 선생님이 힘이 약해지고, 반장·부반장·우등생들이 서로 “내가 진짜 반 대표야!” 하며 싸우는 느낌에 가깝습니다.
2) 호족의 성장 – 지방의 실질적인 주인 등장
이 틈을 타서 등장한 세력이 바로 ‘호족(豪族)’입니다.
호족이란: 지방에서 땅·사람·군사를 장악한 지역 유력자들을 말합니다.
- 토착 세력,
- 군사 지휘관,
- 해상 무역으로 부자 된 상인,
- 지방 행정 담당자 출신 등 여러 유형이 섞여 있었습니다.
중앙이 약해지면서
- 세금도 제대로 못 거두고
- 도둑·산적도 제대로 못 잡게 되자,
- 오히려 지역 호족들이 성을 쌓고 군사를 모아 지역을 지키고 다스리게 됩니다.
겉으로는 “신라 왕의 신하”라고 했지만, 실제로는 자기 동네 왕 같은 존재였습니다.
3) 농민 봉기와 사회 불안 – 원종·애노의 난
왕과 귀족, 호족들이 자기 이익만 챙기는 사이에 가장 힘든 사람은 농민과 평민이었습니다.
- 기근,
- 무거운 세금,
- 노비로 떨어지는 사람 증가 등으로 백성들의 삶은 점점 더 힘들어졌고,
- 결국 터져 나온 것이 곳곳의 봉기(반란)입니다.
그중 유명한 것이 889년의 ‘원종·애노의 난’입니다.
- 지방 관리와 지배층에 불만을 품은 농민과 천민들이
- 곳곳에서 봉기를 일으켰고,
- 통일신라는 이를 제대로 진압하지도, 해결하지도 못했습니다.
이런 봉기는
“이제 예전 같은 통일신라의 힘은 없다” 라는 분명한 신호, 즉 전조현상이었습니다.
4) 해상 세력의 변화와 장보고 이후의 공백
통일신라 중기까지는 장보고 같은 인물이 해상 무역과 해적 진압을 하며 나라 경제에 큰 도움을 줬습니다.
하지만 장보고가 정치 갈등에 휘말려 제거된 이후,
- 해상 무역의 질서가 흐트러지고
- 지방 세력이 바다에서도 힘을 키우는 계기가 됩니다.
이렇게 육지·바다 모두에서 중앙의 통제가 느슨해지자, “각자도생(각자 알아서 살아가는 시대)” 분위기가 강해졌고, 이 틈에서 결국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나오게 됩니다.
후백제와 태봉(후고구려)의 탄생: 견훤과 궁예의 등장
이제 전조현상을 지나, 실제로 새로운 나라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살펴보겠습니다. 후삼국시대의 두 핵심 인물은 바로 견훤과 궁예입니다.
1) 견훤 – 상주 출신 군인에서 후백제의 왕으로
견훤은 대체로 상주(지금의 경북 상주) 근처 출신으로, 처음에는 신라 군인이었다고 전해집니다.
하지만 나라가 혼란해지자, 그는
- 스스로 군사를 모으고
- 특히 전라도·충청도 지역의 호족·농민들을 끌어들여
- 세력을 키우기 시작합니다.
892년 전후, 그는 완산주(지금의 전주) 근처에서 사실상 “나만의 나라”를 만들고, 900년경에는 공식적으로 국호를 ‘백제’(후백제)라 하며 새 나라를 선포합니다.
- 수도: 완산주(전주)
- 옛 백제의 땅을 중심으로 영토 확장
- 신라의 옛 영토를 빼앗으면서 빠르게 성장
견훤은
“신라는 이미 썩었다, 예전 백제의 땅과 힘을 다시 일으키겠다”
는 식으로 백제 계승자를 자처했습니다.
2) 궁예 – 왕족 출신 설화와 ‘후고구려’의 꿈
궁예는 조금 다른 케이스입니다. 전해지는 이야기(삼국사기·삼국유사 계열)에 따르면, 그는 신라 왕족(원성왕계)의 버려진 아들이라는 설화가 있습니다.
- 버려졌다가 절에서 자라난 승려 출신
- 점차 폭넓은 불만 세력과 호족을 모아 무장 세력으로 성장
- 특히 강원도·경기 북부·철원 일대에서 세력을 키웁니다.
궁예는 스스로를
- 고구려의 후예라고 내세우며
- 901년경 ‘후고구려’(훗날 국호 마진·태봉으로 변경)를 세웁니다.
- 수도는 나중에 철원으로 옮깁니다.
또한 그는 미륵불 신앙을 이용해
“내가 바로 미륵, 세상을 구원할 왕이다”
라고 주장하며 종교적·카리스마적 통치를 했습니다.
하지만 시간이 갈수록
- 의심이 많아지고
- 신하와 백성을 심하게 의심·처벌하며
- 폭정에 가까운 정치가 늘어납니다.
이게 나중에 왕건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결정적 배경이 됩니다.
3) 세 나라의 기본 구도 형성
이 시기 지도를 머릿속에 그려보면,
- 서남부(전라도 중심) → 후백제(견훤)
- 북부·중부(송악·철원·개성 일대) → 후고구려·태봉(궁예)
- 동남부(경주 주변) → 통일신라의 잔존 세력
이렇게 세 덩어리의 세력이 긴장 관계를 이루게 됩니다.
왕건의 고려 건국과 세 나라의 힘겨루기
1) 왕건 – 송악 호족 + 해상 무역 세력의 리더
왕건은 오늘날 개성(옛 이름 송악) 지방의 유력 호족 가문 출신입니다.
- 집안은 예전부터 해상 무역으로 부를 쌓았고
- 중국·일본·발해와 교류를 하며 국제 감각도 있었습니다.
궁예가 세력을 키울 때, 왕건 집안은
- 적극적으로 궁예를 도우며 세력의 중심에 들어갑니다.
- 왕건은 궁예 군대의 핵심 장수가 되고,
- 서해 해상 장악·물자 조달·정복 전쟁에 큰 공을 세웁니다.
2) 918년 쿠데타 – 궁예 축출, 고려 건국
하지만 궁예의 폭정과 의심병이 심해지자, 신하들과 장수들은 불안해졌고, 결국 918년 왕건을 중심으로 한 쿠데타가 일어납니다.
- 궁예는 쫓겨나고(이후 행방은 불명으로 전해짐)
- 왕건이 새로운 왕이 되어 국호를 ‘고려’로 정합니다.
왕건은 자신이 세운 고려가
- 옛 고구려의 후예라는 뜻도 살리고,
- 한편으로는 새 질서를 만들겠다는 의지도 함께 보여주었습니다.
3) 왕건의 전략 – 전쟁만이 아니라 ‘사람’을 묶는 정치
왕건이 후삼국 통일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, 호족을 적으로 돌리기보다 ‘포섭’하는 전략을 잘 썼기 때문입니다.
- 혼인 동맹: 지방 호족의 딸들을 왕비·후궁으로 맞아들여 ‘사돈’ 관계 형성
- 관직·명예 부여: 항복한 호족들에게 관직과 땅을 주어 고려 체제의 일원으로 편입
- 해상·육상 교통로 장악: 물자와 군사를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기반 확보
그 결과, 고려는
- 단순한 군사 국가가 아니라,
- 여러 지방 세력이 함께 얽힌 연합 왕국 형태로 성장했습니다.
후삼국 전쟁의 큰 흐름: 공산 전투부터 고창 전투까지
이제 본격적으로 후백제–고려–신라 사이의 전쟁 흐름을 살펴보겠습니다. 모든 전투를 다 적기는 어렵고, 역사적으로 중요한 고비 위주로 정리하겠습니다.
1) 920년대 – 크고 작은 전투와 세력 다툼
왕건이 고려를 세운 뒤,
- 후백제(견훤)과
- 고려(왕건)가
경상도·충청도·전라도·경기 남부 일대를 놓고 계속 부딪힙니다.
신라는 이미 많이 약해져 있어서,
- 때로는 후백제에 치이고
- 때로는 고려에게 밀리며
- 완전히 주도권을 잃은 상태에 가까웠습니다.
2) 927년 공산 전투 – 고려의 큰 패배, 신라 왕의 죽음
927년, 후백제 견훤은 큰 결심을 합니다.
“그냥 주변 영토만 빼앗을 게 아니라, 아예 신라 왕경(경주)을 직접 쳐서 신라를 손에 쥐겠다.”
견훤은 군사를 이끌고 경주를 기습 공격합니다.
- 당시 신라 왕 경애왕은 제대로 저항도 못 하고
- 결국 견훤 군에게 쫓기고 죽임을 당합니다(자결 또는 피살로 전함).
견훤은 신라 왕경을 짓밟은 뒤,
- 형식적으로는 신라를 완전히 없애지 않고
- 경순왕(경애왕의 친척)을 새 왕으로 앉혀 ‘후원’하는 모양새를 취합니다.
돌아가는 길에
- 대구 근처 공산(공산성, 공산 전투)에서
- 왕건이 이끄는 고려군과 크게 맞붙습니다.
이 전투에서
- 고려군은 크게 패배하고,
- 왕건은 거의 죽을 뻔하다가
- 신숭겸 등이 몸을 바쳐 왕을 구하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.
공산 전투 이후
- 고려는 한동안 크게 위축되고,
- 후백제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정도로 올라갑니다.
3) 930년 고창 전투 – 판도가 뒤집힌 고려의 대승
하지만 흐름은 완전히 고정되지 않았습니다.
930년, 안동 근처 고창(지금의 안동 일대)에서
- 다시 한 번 후백제 vs 고려의 큰 전투가 벌어집니다.
- 이것이 바로 고창 전투입니다.
이번에는 상황이 달랐습니다.
- 고려는 이전의 실패를 거울삼아 전략을 세우고
- 여러 호족의 지원과 백성들의 지지를 얻어
- 후백제 군을 크게 격파합니다.
고창 전투 이후
- 후백제의 세력은 눈에 띄게 약해지고
- 고려의 위상은 다시 올라가며
- 균형추가 고려 쪽으로 기우는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.
결말: 신라의 항복과 일리천 전투, 고려의 통일
1) 935년 – 신라 경순왕의 고려 항복
이때쯤 되면, 신라는 사실상 “이름만 남은 나라”가 되어 있었습니다.
- 땅의 상당 부분은 후백제와 고려가 차지했고
- 왕실과 귀족의 힘도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.
당시 신라 왕 경순왕은
“이대로 버티다가는 백성들만 더 고생한다.”
고 판단하고, 최종적으로 고려에 나라를 넘기기로 결정합니다.
935년, 경순왕은
- 스스로 고려에 항복하고
- 왕건은 그를 후하게 대우하며
- 신라 왕실 사람들을 고려 귀족으로 편입시킵니다.
이렇게 해서 신라는 피를 많이 흘리는 멸망이 아니라, 비교적 평화로운 방식의 종말을 맞습니다.
2) 견훤 부자 갈등과 후백제 내분
한편 후백제 안에서는 새로운 문제가 터집니다.
- 견훤이 나이가 들고
- 아들들이 왕위를 둘러싸고 다투는 가운데,
- 특히 아들 신검 등이 아버지에 반기를 듭니다.
결국
- 견훤은 자신의 아들들에게 폐위·유폐를 당하고,
- 아들이 세운 후백제 정권이 들어서게 됩니다.
이에 분노한 견훤은
- 감옥 같은 곳을 탈출해
- 몰래 고려로 도망와 왕건에게 귀부합니다.
그는 왕건에게
“내 아들들이 나를 배신했다. 후백제를 치고, 함께 새 질서를 만들자.”
는 식으로 조언을 하게 되고, 후백제를 잘 아는 내부 정보 제공자가 됩니다.
3) 936년 일리천 전투 – 후백제 멸망, 후삼국 통일 완성
936년, 결국 왕건은
- 고려의 대군과
- 견훤의 조언,
- 여러 호족의 지원을 받아
- 후백제를 최종 공격합니다.
결정적인 전투가 바로 “일리천 전투”입니다.
-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학설이 나뉘지만,
- 어쨌든 후백제의 주력군이 크게 패하는 전투였습니다.
이 전투에서
- 후백제 군은 사실상 괴멸되고
- 왕건의 고려가 최종 승자가 됩니다.
이로써
- 후백제는 멸망하고
- 이미 신라는 항복한 상태였으므로
- 936년, 고려 왕건에 의한 후삼국 통일이 완성됩니다.
우리가 보통
“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했다.”
고 말할 때, 바로 이 936년 일리천 전투 이후의 상황을 가리킵니다.
후삼국시대의 의미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
후삼국시대는 단순히 “나라가 셋으로 갈라져 싸운 때”만이 아닙니다. 한국 중세사의 구조가 바뀌는 전환점이기도 합니다.
1) 왕권 vs 호족 – 고려 체제의 기본 구도
후삼국시대의 핵심은 “호족이 얼마나 강해졌는가”입니다.
- 통일신라의 왕은 귀족들과 싸우다가 힘을 잃었고,
- 그 틈에 지방 호족이 세 나라(후백제·태봉·고려)의 기반이 됩니다.
왕건은 이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,
- 호족을 억누르기보다 끊임없이 포섭·연결해
- “왕 + 호족 연합 체제”를 만들어 냈습니다.
이 구조는 이후 고려 전기 정치의 기본 틀이 됩니다.
2) 수도 개경(개성)의 선택 – 균형의 상징
왕건은 수도를 개경(개성)에 두었습니다.
- 옛 고구려 중심지와도 가깝고
- 서해 해상 교통에 유리하며
- 한반도 중부에 있어 영남·호남·관서·관동 등 여러 지역과의 균형을 맞추기 좋습니다.
이 선택에는
“특정 지역만의 나라가 아니라, 여러 지역 세력이 함께하는 왕조”
를 만들려는 의도도 담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.
3) 민중 봉기와 농민의 존재감
후삼국시대의 시작은 농민·평민의 봉기(원종·애노의 난 등)와 함께 했습니다.
- 이들의 반란은 직접적으로 나라를 세우지는 못했지만
- 통일신라 체제가 더는 버티기 힘들다는 신호를 분명히 보여줬고
- 새로운 세력이 등장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었습니다.
역사를 볼 때,
왕·장군·귀족만 보는 것이 아니라, 그 아래에서 움직이던 민중의 힘과 불만도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.
4) ‘후삼국’이라는 이름에 담긴 계승 의식
후백제와 후고구려(태봉·고려)는 모두
- 자신들이 옛 백제와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내세웠습니다.
이 말은 곧,
“우리는 단순히 신라의 반란군이 아니라, 예전 삼국의 자랑스러운 전통을 이을 정통 국가다.”
라는 정치적 메시지입니다.
결국 왕건의 고려가 살아남으면서, “고구려 계승 + 한반도 전체 통일”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고, 이 흐름이 나중에 조선, 근대 민족주의까지 이어지는 역사 인식의 뿌리가 됩니다.
정리 요약 및 FAQ
정리 요약
-
전조현상: 통일신라 말기에
- 왕위 다툼, 귀족 갈등
- 지방 호족 성장
- 원종·애노의 난 같은 농민 봉기
- 중앙 통치력 약화
-
새 나라의 등장
- 후백제(900): 견훤, 전주 중심, 백제 계승 주장
- 후고구려·마진·태봉(901 이후): 궁예, 고구려 계승·미륵 신앙
- 고려(918): 궁예를 몰아낸 왕건이 건국, 고구려 계승 + 호족 연합
-
전쟁의 흐름
- 927년 공산 전투: 후백제의 승리, 신라 경애왕 사망
- 930년 고창 전투: 고려의 대승, 판도 역전
- 935년 신라 경순왕 항복: 신라 멸망, 고려로의 평화적 편입
- 견훤 부자 갈등 → 견훤의 고려 귀부
- 936년 일리천 전투: 후백제 패망, 고려에 의한 후삼국 통일 완성
-
의미
- 호족이 중심이 된 새로운 정치 구조
- 고려 왕조의 성립과 개경 중심 체제
- 고구려·백제 계승 인식과 ‘후삼국’의 상징성
Q1. 후삼국시대는 정확히 몇 년부터 몇 년까지인가요?
학자마다 약간 다르지만, 보통
- 후백제 건국(900)이나 후고구려 성립(901)을 시작으로 보고,
- 후백제 멸망·고려 통일(936)까지를 후삼국시대로 봅니다.
좀 더 넓게 보면, 통일신라 말기 전조현상이 시작되던 9세기 후반부터 936년까지의 몇 십 년을 한 덩어리로 묶어 이해하기도 합니다.
Q2. 왜 ‘후삼국’이라고 부르나요?
예전의 고구려·백제·신라 삼국과 구분하기 위해,
- 견훤의 후백제,
- 궁예·왕건의 후고구려(태봉·고려)
- 남은 신라
를 묶어서 ‘다시 나타난 삼국’ → 후(後)삼국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.
Q3. 후백제는 왜 결국 망했나요?
주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.
- 고창 전투(930) 이후 군사적 패배로 국력이 약화
- 견훤 부자 갈등으로 인한 내분 – 아들 신검이 아버지를 몰아냄
- 왕건의 고려가 호족 포섭·혼인 동맹 등으로 넓은 지지 기반을 확보
외부에서 밀리고, 내부에서는 싸우고, 반면 고려는 점점 더 단단해졌으니 결국 일리천 전투(936)에서 후백제가 무너질 수밖에 없었습니다.
Q4. 궁예는 왜 실패했나요?
궁예는 초기에 상당한 능력을 보여줬지만,
- 시간이 갈수록 의심이 많아지고, 폭압적인 통치를 하게 되었고
- 신하와 백성 사이에서 불만이 커졌습니다.
반면 왕건은
- 호족과 백성을 끌어안는 스타일이었고
- 주변 인물들이 “나라를 맡기기에 더 적합한 인물”이라고 판단한 것이 918년 쿠데타로 이어졌습니다.
결국 궁예는 정치·심리적 불안정 때문에 스스로 기반을 무너뜨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.
Q5. 신라는 왜 끝까지 싸우지 않고 항복했나요?
경순왕 때 신라는
- 국토 대부분을 잃고
- 군사력과 재정도 바닥에 가까운 상태였습니다.
이 상황에서 끝까지 싸우면
- 왕실과 귀족만이 아니라
- 백성들이 더 큰 피해를 입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,
경순왕은
“고려에 나라를 넘겨 백성을 살리는 것”
을 선택합니다.
왕건도 이를 존중해
- 경순왕을 예우하고
- 신라 왕족·귀족을 고려 체제 안에 편입시키며
- 가능한 한 충돌을 줄이는 방식으로 통합을 진행합니다.